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은쟁반에 구르는 포도알처럼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는 부질없는 위로가 아니다. 어느 천지에 볕들 날을 기다릴까 고심했는데 드디어 작은 햇살이 보인다. 무작정 기다린다고 쥐구멍에 볕이 안 든다. 캄캄한 쥐구멍에 웅크리고 빛이 들기를 기다리는 건 바보짓이다. ‘노력은 성공의 아버지’라 굳건히 믿고 활용할 모든 지혜와 방법을 동원해 희망의 빛이 보이는 쪽으로 헤쳐나가면 끝이 보인다. 궁지에 몰려도 살길을 찿으면 산다. 새해부터는 정말 하고 싶은 것, 꼭 필요한 일,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찿아 세월 속에 묻힌 유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로 한다. 자식과 가족, 타인이나 친구를 위한 염려를 접고 인생의 지도를 새로 그리기로 한다. 인생의 후반기에 적합한 색깔의 깃대를 꼽고 남은 시간 나를 위한 일에만 열중하기로 한다. 그동안 잊고 살았던, 무심하게 스쳐간 세월 속에 파묻혀 흔적조차 사라진 내 모습을 복원하기로 한다. 크게 이룩한 부와 명예도 없고 남보다 특출하게 잘나고 내세울 것이 없지만 열심히 살아왔던 흔적들은 여기 저기 남아있다. 뒤돌아볼 시간도 없었고. 내일을 염려할 여유조차 없어, 매일 씨름하듯 싸우며 살아왔다. 가족과 아이들 챙기고, 사업에 몰두하며 고객들 돌보고, 이웃과 친구, 동료들 틈바구니에서 욕망을 실은 전차는 바퀴가 닳도록 앞만 보고 달리고 있었다. 부를 축척하기 위해 레스트랑 체인을 운영하고, 돈을 벌기 위해 화가의 꿈을 접고 화상이 되었다. 차별의 벽을 넘기 위해 현대미술 화랑을 열고 창작예술센터를 건립하고 아트스쿨을 개관했다. 발뒤꿈치에 피멍이 들도록 아트쇼를 드나들며 안목을 키우고 결코 뒤지지 않을 다짐을 했다. 절벽 끝에서 이판사판 살아남을 이유는 충분했다. 남의 땅이지만 뿌리 깊은 나무로 자라고 싶었다. 내일은 없다. 내일의 태양은 영원히 뜨지 않을 지도 모른다. 오늘 이 순간 찬란한 빛을 가슴에 품지 않으면 내일의 태양은 없다. 격투는 끝났다. 인생의 전쟁은 서서히 막을 내리고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 아이들은 학업을 마치고 짝을 만나 결혼해 손주 둘씩 낳아 가족사진에 숫자가 늘었다. 손주들은 이기적인 유전자 덕분에 만나면 그림공부 하자고 졸라댄다. ‘할머니!’라고 부르는 애들의 목소리가 은쟁반에 구르는 포도알처럼 달콤하다. 인생에는 승리자도 패배자도 없다. 각자의 펼쳐진 길 위를 걸어왔을 뿐이다. 뒤돌아보면 소금기둥이 될까 두려워서 앞만 보고 그냥 달려왔다. 생의 후반기는 허비할 시간이 없다. 지난 날들을 돌아보며 후회하지 말기! 남은 시간이 부질없고 안타까워 넋놓고 살면 두려움의 그림자가 커진다. 겁도 없이 무작정 설치던 청춘의 시간은 찬란했다.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위해 장수처럼 적을 무찌를 준비가 돼 있던 장년은 풍성하고 싱그러웠다. 살아있다는 것이 기적이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꿈도 희망도 사라진 황량한 벌판에 홀로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사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절벽 위에서 혈투가 벌어져 수십길 낭떠러지로 떨어져도 주인공은 구사일생 살아남는다. 목숨을 구걸하지 않을 결심을 하면 남은 시간은 축복이다. 폭풍이 지나간 언덕에도 태양은 찬란하게 빛나고 꽃은 피어난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를 위해 새로운 출발을 꿈꾼다. 욕심 부리지 않고 자랑하지 말고, 머리 숙이지 않고, 작은 뿌리로 남아 봄을 꽃피울 나무 한그루 찿아나선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은쟁반 땅이지만 뿌리 나무 한그루 손주 둘씩